평오큰아버지 일제시대 백제부여에서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평오(상국의 부친, 현양의 조부)큰아버님입니다. 1939년에서 1944년 사이로 추정됨
제2차 세계대전을 즈음하여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한국인을 군인으로 징용하였으나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오히려 일본군을 사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의 뿌리는 하나라는 구호)를 내세왔다. 실제로 일본의 개국신인 한국인을 소홀히하여 전쟁에서 지고 있으니 오오가미(大神)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천 6백 70년전에 부여국에서 온 조선여자를 아마데로스 오미가미(천조대신)으로 모시어 부여국에 그 신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 일을 위해 전국의 청년들 중 결혼하지 않고 인품이 좋은 남자들을 모아서 이소바라이(물에서 세례)를 하고 일하게 했다. 대구지방에서는 김정오큰아버지가 동생인 김평오를 추천하여 백제의 수도인 부여로 보내어 일을 하게 하였다. 김평오큰아버지의 옆에는 일본 군인의 모습이 보인다. 다음은 당시 이 일에 대해 쓴 조선일보의 기사내용이다.
유서 깊은 부여 낙화암 근처에 일제 신사터 건립을 찬양하는 조선일보
유구엄연한 사실이 명시하는 바 만대에 드리운 내선일체의 열매는 이제야 소생되어 동아신질서건설의 전진기지인 반도는 찬연한 광영에 넘치고 잇다. 이 봄에이천삼백만 민심이 한곳에 도라가는 경건하고 또 숭고하기 그지업는 신을 우리 반도땅에 봉재하는 무한한 감격과 엄숙한 기쁨을 느낀다.
총독부에서는 크나큰 이감격에 호응하야 옛날 일천삽백년전 내선일체의 왕도로서 유서 깊은 충남 부여의땅에 관폐사 건립의 계획을 세우고 중앙각관계방면과 신중한 혐의를 하던중 모든 소속이 끗낫스므로 당일오전십일시 총독부당국 담화를 발표하고 마침내 부여신사 어조영구
체화에 착수하게 되엇다.
지난날의 사적에 비추어보건데, 당시 일본과 백제 신라 고려 삼대사이에 어교설이 기프셧던 웅신천황 천지천황 제명천황 신공황후의 어
사조의 신을 모실 신역 백제의 왕도 부여가 비록 황폐하여졋다고는하지마는오히려 산수가 아름답고 신훈이 역연하야 그중 알맛는 곳
이다.
이미 경내의 후보지도매수가 끗낫고 때가마친 기원이 천육백년을 압둔터라 소화십사년(1939년)도부터 아프로 오년동안 일백오십만원 평년도 사만육천원의 경비를계상하엿다. 장소는 부여읍뒷산어요 백제산성이 잇는 부소산에 이십만평을 경내로 택하엿다
청소년 수련장 신사와 아울러 건립
부여신사의 건립과 아울러 총독부학무국에서는 부여의신역에 청소년수련도장을 세우고저 반금 그규정의 성안을 급히하고잇는중이다. 이수련소는 일년을 삼기로나누어 반도의 청년,장년남녀 각이백여명씩 도합육백명을 각도지사의 추천을바다서 수용하고 넉달동안 훈련양성하야 농촌에 보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일기에는 농촌의지도자가 될만한 청년 이백명을 제이기에는 부인단체에 중견지도자가 될만한 여자 이백명 제삼기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연맹지도자가 될만한 청년 이백명을 양성하기로 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