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181cm 한창때 최고 몸무게가 고작73kg. 이런 호리호리한(?) 몸으로 해방직후 모래판의 황제로 군림하며 황소를 최소 100마리 이상 탄 사람이 있다. 서울장로교회 김상영 장로(82세∙센터빌 거주)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마른 체구에 안경을 낀 김 장로를 처음 본 인상은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이었다. 일반인들이 통상 생각하는 어깨가 딱 벌어진 근육질이거나 키가 매우 큰 거인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근육질의 덩치들을 쓰러뜨리고 당시 모래판 장사들을 눕힐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대구 계성학교 재학시절(당시 중2) 제 키가 우리반 60명중 정확하게 중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체육시간에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저보다 훨씬 큰 애들까지 모조리 쓰러뜨렸습니다. 타고난 운동신경과 유연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첫번째 씨름대회 우승은 한국씨름이 아닌 일본 씨름 ‘스모’였다고 한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그는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청년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때 대구에 있는 일본 신사 앞에서 열린 스모대회에서 출전해서 거구들을 차례로 꺾고 우승을 한 것이다. 이 후 해방때까지 약관 20세도 되지 않은 어린나이에 한국씨름도 2번이나 우승했다. 첫 황소를 받은 것도 이때다. 19세때 낙동강변서 열린 씨름대회에서 ‘마산장군’이란 애칭으로 불린 25세의 박신규 장사를 꺾고 당당히 우승한 것이다.
“씨름대회서 받은 황소 100마리는 훨씬 넘을듯”
“씨름판에서 황소를 타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명성을 날린 시기는 해방직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까지였습니다. 아마 제가 씨름대회 우승한 수는 100번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일부 신문은 300번 우승을 했다고 보도했지만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해방공간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씨름판에서 학식과 체력을 모두 겸비한 엘리트 체육인으로써 김 장로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듯 했다고 한다.
“해방직후 대구 전매청 뒤뜰에서 열린 ‘제1회 대조선씨름대회’에 출전 3등을 해서 당시 씨름판의 4대천왕 중 한명인 나윤칠 장사와 번외경기(꽃씨름)를 가질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를 멋지게 눕히자 관중들이 열광하며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번 더 하라는 것이었지요. 나 장사 측도 재시합을 요구해 한번 더 했는데 제가 졌습니다. 결국 승부를 가리는 3번째판에서 또 제가 이겼지만 나 장사측의 협박으로 두 판을 더 해서 3대2로 져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기로 일약 씨름판의 양대 거두로 떠올랐습니다.”
이 경기 이후 씨름계는 나윤칠파와 김상영파로 나눠졌다고 김 장로는 약60여년전 당시를 회상했다. 그 에게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전 대전에서 씨름경기가 일주일간 열렸는데 매일 우승자에게 소 한마리씩을 부상으로 줬다고 한다. 마지막날 우승자에게는 황소 2마리가 주어지는 큰 대회였다. 김 장로는 대전대회에 뒤늦게 출전해서 황소 4마리를 부상으로 받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씨름꾼들 재주 많고 낭만 넘쳐
이밖에도 경주 ‘신라제’ 씨름대회서는 47년부터 49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김천∙울산∙청주∙영동 등지에서 우승 한 것까지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김 장로는 씨름외에 육상경기에서도 우수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만능 스포츠맨 이었다.
투창은 경북 최고기록을 10년 동안이나 보유했고, 1952년 대한체육회 주최 육상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 100m 달리기 11초4의 기록을 올리기도 했다.
황소를 부상으로 받으면 수입이 짭짤했을 것이라고 질문하자,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 황소를 팔아 출전자들의 숙식비와 대회 후 회식비로 다 써고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당시 씨름판의 미덕이자 씨름인들의 때묻지 않은 낭만이었던 것이다. 씨름꾼들은 대회가 끝나면 밤새도록 술을 먹고 놀았다고 한다. 그러면 배뱅이 굿이나 상여꾼들이 부르는 만가(輓歌)를 전문가 뺨칠 정도로 구성지게 늘어놓고는 했다고 한다.
“황소를 집으로 가지고 온 적은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씨름꾼들과 시합해서 1등을 해 쌀6가마를 가지고 온 적이 있는데, 이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김 장로 부인 손복희 권사는 회상했다.
대회 참가경비는 샅바를 팔아 충당했다고 한다. “우승자 샅바로 속옷을 만들면 아들 낳는다”는 속설을 믿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덕∙체 겸비…중∙고 교장, 대학교수 등 지내
김 장로는 해방이후1946 년 미 군정때 중등학교 교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을 해 성주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1947년 경북대학교의 전신인 대구 사범대에 편입해 졸업했다. 대구 계성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60년대 부산 동주여상 교장으로 부임, 이 학교를 전국 최고의 농구 명문으로 육성했다. 이후 마산 창신고등학교 등에서 교장을 거쳐 대구 계명대학교와 한양대 등에서 교수를 지내다 정년퇴직 했다. 약20년전 미국에 온 김장로는 현재 서울장로교회 신망회 합창단의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김 장로는 교사이자 씨름선수로써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가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씨름대회는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 참가했지만, 교장의 특별 허락을 받아 학기 중에도 출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번은 서울 뚝섬에서 열린 씨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숙소인 숭도학사에 묵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김구선생이 강의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회시간과 겹쳐 고심을 하다가 과감히 대회를 포기하고 강의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장로의 부친 김정오 장로는 경성약전 1회 졸업생이자 대구시의회 제1대 의장을 지냈다. 대구의 유서 깊은 대형교회인 서문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부인 손복희 권사의 부친 손인식씨도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였으며, 대구 동산병원 내과과장과 한독당 도당 위원장을 지냈다. 역시 서문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했다.
“5.16 직후 박정희 정권때 친구인 한 기업인의 억울한 민원을 해결해 주기 위해 대구중학교 제자인 윤필용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청와대 복도에서 대위 한명이 저를 보고 씨름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이 ‘팬’이었다고 말해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전두환 전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한때 ‘모래판의 황제’이자 교육자로 명성을날렸던 그도 세월의 흐름 속에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지만 씨름계와 교육계에서 그의 이름 석자는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