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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교회와 경명학교의 약사

by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453번지 2012. 11. 28.

 

 

 

김정오 장로님께서 직접 적으신 자료를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이령리 새마을(경남 함안군 칠북면)

                                         예배당 신축봉헌식 약사

 

1976년 1월 2일

대구제2교회 원로장로 한국장수대학원장 김정오 봉독

1975년 12월 30일 10시 서울교북동 12-3에서 씀

 

주후 1884년 부활절 미국에서 장로교 선교사 원두우목사와 감리교회 선교사 아편설라목사가 인천제물포에서 입국하여 이땅에 선교를

시작하고 교회를 세우게 되자 부산에서도 배위량, 노세영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움에 김해읍에서 교회가 설립되여 배성두장로(배대위 조부)가 처음 믿게 되고 그의 친구인 김수업(김수홍장로 외조부)영수(정로되기전 집사보다 높은 직)가 같이 예수를 믿고

고향인 이곳에 전도를 시작하니 1987년 봄이라

 

김성아(김정오장로 조모) 이성근(김순장로 조모) 두 동서와 복음노인(얼글이 천연두로 얽었다고 뽀끔노인이라 불렀다함) 세 노여사가 처음 믿고 김세민장로 사랑방에서 3, 4개월을 열심으로 기도하고 장녀 김복남(배대위 모친)은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그 부친 김세민은 아직 믿지는 않으나 어머니와 숙모를 위하여 전도지와 낱복음(쪽지로 된 작은 성경)을 읽어드리다가 그해 5월 중에 믿기로 결심하니 선교사 노세영목사가 그날부터 영수직을 맡김으로 칠원 연개(蓮浦 여기서 浦는 우리말로 갯벌을 의미하는 개라고 읽음)교회 즉, 지금의 이령교회가 창립되다.

 

1900년 봄에 김정오가 처음 유아세례를 받고 김세민은 영수로 시무한지 20년인 1916년에 경상노회에서 장로에 임직되고 이령교회 당회가 조직되고 1936년에 이 터에 이령예배당을 근대식으로 신축하고 헌당식과 김세민의 장로 재직 40년(영수 20년 포함)의 표창식을 거행(당회장 박군현목사 사회)하다. 이날을 기념하여 김정오는 덕촌 성(成)부자의 기와집 4칸을 교회사무실로 옮겨서 짓고 헌납하여 삼안당(三安堂)이라 이름짓다. 1931년 9월에 금강산 수양관에서 전국 총회가 모일 때 父子장로가 총대로 같이 참석하였다. 1939년 3월 2일 김세민장로님 별세하심에 따라 이 예배당에서 당회장 김응진목사 집례로 3월 6일 장례식 예배를 드리다.

 

1904년 봄에 이령교회 선교회의 도움으로 경명학교를 설립하여 마산과 인근에서 학생이 모였고 1911년에 첫졸업생으로 李順弼, 金守洪, 金正悟, 金應祚 4명이 나왔으며 이들은 나중에 모두 장로가 되다. 1914년에 본 교회에서 여천순, 김정희, 김하여, 양남수 처녀 4인이 미국 하와이에 이미결혼하여 그곳에서 토지를 개척하고 앞장서서 독립운동에 이승만박사를 협력하고 현재 대부분 자랑스러운 후예를 가지게 되다.

 

1919년 3월 9일에 이령교회와 경명학교가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일어나서 교우 김斗良(김순장로의 부친)씨 외 여러분들의 옥고를 치루게 된 바 해방 30년 기념으로 만세운동기념탑과 장학재단을 추진 중으로 압니다.

 

경명학교 역대교직원에는 설립자겸 교장인 김세민, 교감 여도선, 교사 곽화서, 김백은, 김주관, 김주현, 구만서, 김정오, 김순, 함태영, 김철부, 황징규 제씨이고 선교사는 로세영, 배위량, 어을빈, 사보담, 심익순, 위철지, 인노절, 라대벽, 손빈련, 맹호은,권부인, 민주부인 외 여러분이었다. 조사와 전도사는 백도명, 김기현, 서초시, 고명우, 김주관, 이현필,이윤기, 이윤종, 장상언, 서성숙, 김길창, 최일형, 함태형 제씨이고

순회목사와 당회장은 선교사 외에 주공삼, 정기정, 심취명, 김응진, 김길창, 박군현, 권남선목사이고 영수는 김세민, 김수갑, 이만응, 여경청, 임경한, 여도선, 손학봉 제씨이고 장로는 김세민, 엄도일, 윤봉수, 여찬송, 여찬식 제씨이고 집사와 권찰은 80년간 많은 분이 수고하다.

 

이령교회에서 전도되어 설립된 교회는 창원군의 가래골(본포)교회, 갈전교회,남백교회, 상천교회, 밀양반월교회, 창녕군의 오가리(오호리)교회, 장척교회, 남지교회, 영산읍교회, 칠원군에 칠원읍교회, 내내교회, 용동(칠성)교회, 평림교회 등 13처로 기억됩니다.

 

예배당은 처음에 김성아할머니의 사랑방(현 죽전장 서편방)에서 오동나무 옆에 3간초가, 그후 그터에 새(갈대)로 이은 10간집과 북편에 학교집 그리고 1936년에 이터에 김세민장로가 앞장서서 30평 근대식 건물을 짓고 아래채 사무실로 기와집 4간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말 동네사람 80%나 예수를 믿고 교세가 좋았는데 일제폭압이 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종교의 자유를 구속하기 시작하고 소위 대동아전쟁의 시작으로 선교사는 추방되어 교세가 위축되는 현상이 빚어지다.

 

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교세는 복구되었으나 총회로부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던 이들이 새노회와 총회(현재 고신교단을 가리킴)를 조직함에 따라 본 교회도 이에 찬성하는 신자들이 처음에는 가정에서 후에는 교회사무실에서 따로 모이다가 전에 있던 장소인 관말입구 논가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령제일교회로 모이자 나머지 성도들도 그 부근(현 통합교단 소속의 이령교회가 있는 곳)에 새로 교회당을 지음으로 (너무 가까이 있고 운영상 불편함이 심하여) 근자에 양 교회가 무조건 합하기로 종용하였으나 성립이 안됨으로 본 교회(현 고신교단 소속의 이령제일교회)에서는 (처음 예배당이 있었던) 이곳에 다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성도들이 성심을 다하고 교계유지들의 협조를 받아 김세민장로 유가족들이 할아버지 생시에 세웠던 곳이고 장례식을 가졌던 이 자리에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

 

오늘 헌당식예배를 거행함에 동생인 周悟목사가 부산과 대구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는 중 이곳에 와서 설교를 하게되고 필오동생이 협력 참석하며 어머니께 효도하던 강오동생이 아버지遺跡(남긴 발자취)를 중시하여 이일에 크게 헌신하고 막내 이오동생이 신학에 입학하여 이 교회강단을 맡게되는 이 기쁨을 여러 교우와 일가친척 그리고 귀빈이 모인 이 식에 김세민장로의 맏아들이며 이곳 경명학교에서 65년전에 1회 1호 졸업장을 받은 불초 정오가 80老軀나마 건강한 몸으로 서울서 달려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약사를 봉독하게 되는데 멀리 일부러 오신 김길창목사님(현 경성대학교 설립자) 내외분은 90고령에 본교회와 소년시부터 관련이 계시고 동생 강오의 맏동서로 이 자리에 참석하여 앞으로 축도까지 하시게 됨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끝장 끝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976년 1월 2일

대구제이교회원로장로 한국장수대학원 원장 김정오 謹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