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오장로님의 가족 복음역사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 살고 있던 김세민의 어머니 김성아는 1839년 남편 김기철(金基哲)을 여의고 외아들 세민만 바라보며 살다가 병까지 자주 생겼다. 2대째 독자를 둔 불안한 마음에 유명한 무당들을 찾아다니며 독자 김세민을 통해 태어날 손자들만큼은 많기를 빌었다. 이를 반복하던 중 김해 김씨 종친회 회비를 받으려고 나타난 조카 김선약(일명 수업)에 의해 복음을 듣게 된다. 그 후 김성아는 자신의 손아랫 동서인 이성근과 동네 그리고 다른 여인 복음노인(福音老人)을 권하여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김세민은 밀양 박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았는데 이들 중 장녀 김복남이 태어나고 장남 김정오 그리고 차녀 김순남이 태어나게 된다. 삼남매를 낳은 박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김세민은 칠원교회의 손종일로부터 재혼을 권유받았다. 세계가 존경하는 순교자 손양원목사의 부친인 손종일은 6살 아래로 형님과 동생사이처럼 잘 지내는 사이였다. 친형과 같았던 김세민이 혼자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손종일은 때마침 칠원교회서 하와이로 신부로 가게 될 처자 중 하나를 소개했다. 그 처자는 믿음 때문에 진동의 한 유교집안에서 쫓겨나 칠원교회에서 살고 있던 배씨였다. 어머니 김성아의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자녀의 복을 허락하시어 둘째 며느리 배씨로 부터 주오, 태오, 평오, 필오, 강오, 칠오, 이오 그리고 주희 주복 등 모두 8남 2녀가 태어났다.
전술한대로 김세민이 기독신앙을 믿게 된 배경에는 아들 하나만 낳은 한(恨)을 가진 모친 김성아 때문이다. 아들도, 손자도 하나만 남겨진 가문에 대해 지울 수 없는 부담과 애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으면 자손이 번성한다는 말을 듣고 기독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같이 기독신앙을 전달해준 인물이 바로 김해교회의 초대 영수였던 배성두의 친구로 알려진 김선약(金善若)이다. 김선약은 당시 김해에 거주했던 인물로 고을의 풍헌(지금의 면장)을 지낸 인물이며 또 다른 이름은 소설 약방집 예배당에서 전하는 대로 ‘김수업(金守業)’이다. 이때가 1897년 봄으로 수개월을 열심히 기도하고 장녀 김복남도 함께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그 부친 김세민은 아직 믿지는 않으나 어머니와 숙모를 위하여 전도지와 복음서 하나만 있는 작은 성경인 소위 쪽복음이라는 책을 읽어드리다가 그해 5월 중에 믿기로 결심하고 선교사 노세영목사가 그날부터 영수직을 맡김으로 칠원 연개(蓮浦)교회 즉, 지금의 이령교회가 창립되었다. 1900년 봄에 김정오가 처음 유아세례를 받고 김세민은 영수로 시무한지 20년인 1916년에 경상노회에서 장로에 임직되고 이령교회 당회가 조직되고 1936년에 이령예배당을 근대식으로 신축하고 헌당식과 김세민장로의 제직 40년(영수 20년 포함)의 표창식을 거행하였다. 이날을 기념하여 김정오는 덕촌 성(成)부자의 기와집 4칸을 교회사무실로 옮겨서 짓고 헌납하여 삼안당(三安堂)이라 이름지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5남 김필오옹의 전언에 따르면 김세민은 당시 만석꾼(소설 ‘약방집 예배당’에는 천석꾼으로 나옴)으로 불려졌으며 고향 칠북 뿐만 아니라, 영산, 진영, 김해에까지 전답이 있어서 일 년에 두어 차례씩 추수 때나 지역 행사 때마다 부친을 따라 다니면 사람마다 허리를 숙여 절을 했고 배에 오르거나 내리면 떠나기까지 허리를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순사들도 아버지에게는 깎듯 했으며 특히 시장에 다니다가 국밥집에라도 들어서면 3,40명씩 되는 손님들이 전부 일어나 허리를 숙였는데 그런 분이 예수를 믿고 영수 노릇을 하니 이령교회 교인뿐 아니라 각처에 오고가는 사람들 중 교인이라면 아버지 신세를 안진 사람이 없었고 누가 예수 믿는데 장사가 안 되거나 굶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흔쾌히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밭과 논을 관리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머무는 집이 있어서 오가며 그 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녔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현재 창원시 의창구에 위치하는 본포교회는 1901년 최초의 전도자 김화일 씨의 전도로 이종근 씨 집에서 이현필 씨 등 10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김화일이란 여성이 바로 김세민의 누나다. 김화일은 믿는 집안에 시집을 가기위해 혼처를 찾는 중, 본포에 거주했던 이종근을 만나 결혼했는데 동생 김세민의 경제적 도움과 전도로 본포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본포교회 이종근과 김화일 사이에서 태어난 4형제(이현필, 순필, 윤필, 수필)는 모두가 장로로 섬겼고 이 중 이현필은 이령교회 조사로서, 칠원 교회 조사로서 활동하면서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했던 인물이다. 또한 딸 이필임은 당시 마산에서 고무신 공장을 하던 손상호와 결혼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김영삼 전대통령의 부인 손명순여사이다.
지금 이령교회 옆에 있는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는 한 때 학생수가 12반을 넘을 정도로 상당히 컸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의 원래 설립자 또한 김세민이다. 학교 연혁에 의하면 1904년에 사립 경명학교로 시작하여 1911년 4월 1일자로 초대교장 직을 맡았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 8일 만인 3월 9일 칠북 연개장터에서 일어난 배경에도 김세민과 그 일가친족이 되는 김두량, 김순, 아들 김정오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령교회와 경명학교가 주도한 만세운동이었다. 한 동안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영산의거설과, 밀양의거설이 대립되어 왔지만 실제 영산의거는 3월 11일이며 밀양의거는 3월 13일이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 날짜가 칠북 연개보다 이틀과 나흘 각각 뒤떨어져 있다. 따라서 이령교회가 주도했던 칠북 연개장터 의거가 경남 지방 최초의 만세 운동이 된다. 이 사실이 최근에 와서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같이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부산도 아니고 대구도 아닌 작은 농촌 칠북에서 시작된 이유가 바로 김세민의 아들 김정오와 사위 배동석 때문이다. 서울에서 3.1 만세 계획하면서 경남 대표를 선정하려 경북 대표 이갑성을 2월 23일 마산에 보냈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 배동석을 마산으로 파견하였다. 배동석은 이때 처가에서 아내 김복남을 만나 일박을 하고 2월 26일 마산으로 향한다. 그러나 또 다시 대표 추천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칠북 이령 처가에 다시 들러 장인 김세민에게 3.1 만세운동 계획을 소상히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세민과 일족 및 칠북 지역의 유지 14명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과 서울 3.1 운동 참관을 위해 상경했다. 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 칠북 연개 의거의 가장 밑거름이 되었다.
배동석은 3.1 만세운동건으로 유관순 열사와 함께 고난을 받고 출옥 후 바로 세상을 떠났으며 김정오 역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다. 김정오는 대구 시의회활동을 통해 대구발전에 기여했으며 첫 민선 시의장으로 봉사했다. 교회봉사로는 대구제이교회의 전신인 달남교회 장로(1927년 1월 안수)로 봉사했으며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 우승을 슬퍼했던 손기정에게 당시 송아지 한 마리 값에 해당되는 거금으로 대구우체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보를 축전을 독일 베르린에 보냈고 훗날 두 사람은 서로 만나 그때의 감격을 다시 나누게 된다. 지금도 김세민 장로의 후손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교육계로는 계명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김상열교수, 현재 고신대학교 인문사회복지대학장으로 있는 김상윤교수 등이 있으며 (대구 쪽에 추가할 것) 가 있으며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로는 고신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김주오 목사와 그 동생 김이오 목사 그리고 그 네 손자 상백, 상욱, 상식, 상학 모두가 목사로 섬기고 있고 의료계는 김강오장로 와 그 아들 상훈이 있다. 그리고 많은 손자들 중에서도 장로와 의사들이 나와 모두 20명이 넘게 되었다고 하니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당시 장로는 교인들 먹이는 것이 장로였던 때라 장로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했던 시절이고 또 재산 다 팔아 교회를 위해 섬겼던 시절이요 선친도 그 많던 전답을 교인들 살리는 일에, 교회 세우는 일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으니 이것이 큰 복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참 감사한 일이지......”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7집』(2006)
이현찬 집필,『칠원교회백년사』(칠원 : design group HAN, 2009)
조규통, “칠원지역에서의 개신교 전래 시기”, 『부산ㆍ경남 기독교역사연구』 제15호, 부산경남기독교 역사연구회, 20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