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배동석열사

by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453번지 2012. 10. 28.

보낸사람: 전대길 <daegila@dongyangems.co.kr>

받는사람: 조 일래 <ilchough@hanmail.net>

날짜: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16시 33분 56초 +0900

제목: <조일래 歷史칼럼)..."裵東奭 烈士를 기억하십니까?"

 

<朝鮮獨立運動史> -裵東奭 烈士(1891-1924)編

 

"" 이거 보시오 판사님 !

朝鮮백성이 제 나라 독립을 꾀 하는 것이 뭐가 罪란 말이오? 여기는 조선땅이고 우리 조선 사람이고 우리 주권을 찾겠다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소 우리를 죄인 취급하지 마시오 죄인은 당신들 日本人들이오 우리 朝鮮을 빼앗은 것은 당신들이란 말입니다 ! ""

--배동석열사의 법정에서 日本 판사를 질타 한 말-

 

1919년 2월 중순

제5및 제 15피고인 裵東奭은 朝鮮民族代表者라 지칭하는 李甲成(33인중의 한대표)의 방에서 누차 회합해 朝鮮獨立運動에 관하여 총독부에 청원할 터이니 경남 마산지방에 출장하여 同志者를 모집하라는 의뢰를 수하고 ---------.

이런 판사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東奭은 감았던 눈을 반쩍 떳다.

그의 가슴으로 견딜 수 없는 불같은 기운이 치 올라 왔다.

 

거침 없이 흘러나오는 東奭의 우렁찬 목소리에 法廷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순간 조용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어 하며 동석은 벌떡 일어나 재판대로 걸어 갔다. 그리고 그는 거기 놓인 서류들을 바닥에 내 팽개쳤다. 바람을 일구어 서류뭉치들이 바르르 흩어지자 보초를 서던 日本憲兵 두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 왔다. 그 순간이 었다. 동석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잽싸게 들어 栽判官의 머리를 내리첬다. 누군가 청중석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이마에 피를 흘리며 재판관이 쓰려 젔다.

"" 바까야로! ""

 

裵東奭은 본래의 죄명에 법정冒瀆罪가 가중되어 10년 형을 언도 받고 서울 西大門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모진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쇠약하여 만 33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동석의 아버지는 원래의 이름은 영업이란 불교식이름을 성두(聖斗)라고 개명했다. 선교사로 부터 예수를 전도받아 김해에서 제일먼저 교회를 세운 장로이시다. 참으로 동석의 가족사는 기구한 것이 였다 동석이 나가전에 일곱자매가 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찍 다 죽었다. 이를 본 동석의 어머니는 대를 이어야 한다면서 둘째부인을 맞도록 하여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낳게 되었다. 이런 사이에 예수를 믿고 기도한 결과 인지 몰라도 본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지난 십년전 전염병으로 아이들을 모두 잃고 난 후 십년만이 였다. 처음에는 萬福이란 이름에서 東奭으로 개명하고 1906년 대구 啓聖中학교에 베어드목사의 추천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1907년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啓聖의 학도 20인은 朝鮮땅이 왜놈의 발아래 더럽혀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이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노라. 왜놈들은 조선의 조정에 침입하여 왕비를 시해하더니 이제는 조선의 고귀한 황태자저하를 바다 건너 왜놈 땅으로 압송하기에 이름에 우리는 더 이상 분을 참을 수 없어 일어 났노라. 우리는 훗날 이 조선을 이끌고 갈 젊은이들로 나라의 앞날을 부흥시키기 위해 신학문에 몰입하고 있는바 대구 시내 상권을 좀먹어 가는 왜인의 처사에 또한 憤慨를 금치 못하노라. 그들은 우리 조정에 까지 들어와 정치권을 행사해 나라를 난세로 몰고 이제는 저잣거리에서 상권을 휘두르며 조선 백성의 사림살이 까지 위협하는 바 우리는 그들을 경계하고 逐出할 책임을 느끼노라. 朝鮮人의 이름으로 조선을 책임질 젊음과 지성의 이름으로 왜인들에게 告하노니 그들은 속히 황태자 이은 저하의 압송을 중지할 것이며 이 땅에서 물러갈지어다.>--- 학교 代表 裵東奭 이하.

 

그 다음날 저잣거리에 도착한 후 "학도결의문"을 낭독하자 사람들이 모이는 사이에 20여명의 학생들은 호주머니에 넣은 돌을 일본인 상가의 유리창을 향해 던졌고 급기야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합세하여 충돌이 일어나고 계성학교학생이 부상당하는 가운데 일본헌병이 출동하여 학생20명은 전원 체포되었다. 결국 이듬해 1908년 3월 계성학교교장(안의화)이 배동석을 퇴학시킨다는 각서를 쓰고 겨우 동석은 풀려났다. 계성학교교장의 추천으로 배동석은 서울의 언더우드가 세운 儆新中학교에 전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게 된다.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나중에 독립선언문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 된 李甲成을 만나게 되고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伊藤博文이 安重根에 의해 살해된 사건등도 이야기하였다. 배동석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木浦에 있는 유일학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대구계성 경신학교의 선교사들로 부터 배운 영어 실력은 이미 널리 알려 진게 사실이다.

 

목포의 유일학교를 그만둔 사이에 김복남이란 규수와 결혼을 하고 1915년에 세브란스에 입학하게 된다 경신학교동기생인 이갑성이 세브란스 서무과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에 한층 고무되었다. 배동석은 이미 세브란스에 입학하전 <大韓光復會>에 가입한 상태였다. 마침 대한광복회의 모임에서 만주에 독립활동기금을 전달혀는 임무가 부여 되었다. 누구의 지시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배동석은 자원해서 만주행을 택했다 학문은 미뤄어도 할 수 있지만 독립은 미룰 수 것이 었다. 학교는 휴학하고 만주길에 올랐다. 1916년 5월 간도사정을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동석은 기차를 타다가 걷다가 다시 마차를 타고 참으로 갖은 고생끝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만주의 서간도지방 한 군사훈련시설에서 박상진이 지명한 전투세력과 접선했다. 그 조직은 독립군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였다. 이곳에서 이희영,이시영,이동녕,등을 만났다. 무사히 만주를 다녀온 배동석은 예정대로 1917년 봄 학기에 다시 세브란스의전에 복학했다. 1917, 1918년 봄까지 학업에 전염하면서 근 영어가 유창한 점을 이용하여 스코필드박사와 에비슨과 영어로 깊은 유대관계를 가졌다. 또 연락이 왔다. 대한광복회대구지부로 부터 지난번 성공적으로 만주를 다녀온 배동석에게 이번에는 상해에 다녀오라는 연락이었다. 늙은 부모는 탄식했지만 광복회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석은 이 사실을 에비슨에게 알리고 만주를 갔다 이번에는 김좌진장군을 만났다. 김좌진장군집에서 머물다가 배편으로 상해에 도착하여 이동녕선생을 만나 가져간 군자금을 전달하고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에도 도와준것에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1919년 2월상해에서 돌아 온 국내사정은 흉흉한 분위기였다. 1919년 2월 26일 이갑성의 부탁대로마산행 기차에 올랐다.

마산역에 도착한 동석을 기다리는 사람은 동래일신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호주선교사가 운영하던 義信여학교에 교사로 있던 朴順天이다.

"박순천입니다. 이갑성씨 친구 분이 맞나요?"

"예! 저는 배동석입니더"

독립선언문을 전달하고 박순천을 그것을 가지고 의신학교에 가서 밤을 세워가면 등사기로 독립선언문을 복사했다. 이렇게 전달된 독립성언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배동석열사는 구속된 것이다. 이런 배동석의 자료를 그의 둘째아들 배유위가 수집한것을 배동석의 손자인 배기호가 자료를 정리하여 작가 박경숙에게 의뢰하여 <약방집 예배당-Saga of the Pai family>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못난 백성 무능한 정부에도 이런 후손들이 열과 정성을 다하여 드디어 보훈처에서 1980년 8월 15일 배동석열사는 독립운동의 노고에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 글의 완성을 앞두었던 2004년 배동석열사는 독립유공자로추대를 받아 2004년 10월29일에 그 유해를 고향선산에서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참으로 다행스럽다.